책소개![책소개 펼치기/닫기 화살표](/images/uce/commmon/downArrow.svg)
이곳에서 살 수 없는 물건은 없었다. 숨 쉬고 있는 것부터 죽은 나무까지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있었다. 사람들은 필요하거나 필요치 않은 물건까지 양손이 넘치도록 사들고도 시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장사치들의 수완과 입담에 혹하거나 새로운 물건에 넋이 빠진 사람들, 기어이 미로에 갇히고도 벗어나길 원치 않은 사람들로 인해 오일장은 언제나 사월의 논바닥처럼 시끄러웠다.가끔은 시끄럽고 냄새나고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는 이 시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지만 나를 끔찍이 아끼는 명진, 그러니까 내 아빠 때문에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빠와 내가 비록 전혀 닮지 않았고 서로 다른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관계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애틋한 운명임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아빠와 내게 시장은 가혹하고 무서운 곳이면서도 풍요롭고 따뜻한 두 얼굴을 한 곳이었다.늙은 점박이 개 ‘삽교’에게는 아빠 몰래 집을 빠져나와 홀로 시장을 산책하는 버릇이 있다. 삽교에게는 원래 고양이 친구인 ‘송이’가 있었지만, 송이는 “누군가에게 고기로 먹히는 것보다 배고픈 떠돌이 생활이 낫다”며 집개인 삽교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삽교는 아빠 ‘명진’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삽교 역시 본래는 이 모란시장에 고기가 될 운명으로 잡혀 온 강아지였다. 그런 삽교를 구해 명진에게 맡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개 도축업자인 ‘경숙’이다.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협박과 강요로 개를 도축하는 경숙은 케이지 안에 갇혀 있는, 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버린 개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경숙에게는 이 모란시장과 ‘대도축산’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경숙은 마치 목줄에 묶인 개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하지만, 이곳의 주인인 ‘박 사장’에게만큼은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