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책소개 펼치기/닫기 화살표](/images/uce/commmon/downArrow.svg)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네가 말했다”왜 이 시집의 제목은 ‘사육’이 아닌 ‘사육사’일까. 그와 더불어 시집의 표제 시인 「사육사」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도대체 무엇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는 것일까. 알레고리의 본뜻이 언어의 유사성에 기대지 않고 낯선 이미지들을 병치시켜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 내는 방법론에 있는 것처럼, 일견 개를 키운다는 일에 대한 서술처럼 보일 ‘사육사’가 뜻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 것일까. 당연하겠지만 이는 실제로 동물을 기른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임후의 다른 시인 「개버거」에서 말해진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부모를 잃은 개들’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요컨대 ‘키우는 일이 죽이는 일’이라는 것. 동시에 “먹이를 주는 길이 독을 먹이는 길”이라는 말의 알레고리적 함의란 개이자 시인이 저 무의미한 세계로부터 ‘사육’당해 왔던 근원적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사육’이자 ‘살육’인 것에서 벗어나며 헤어날 수 없다는 점. 무가치한 세계이자 ‘사육사’의 존재는 ‘개’이자 ‘나’를 키우면서 동시에 죽일 뿐이다. 어떤 의미나 질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즉 ‘사육사’이자 ‘세계’ 그 자체는 ‘나’이자 ‘개’의 대척점에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개를 묻히지 않는” 존재로 보여진다. 요컨대 깨끗하고 깔끔한 세계의 방식이자 이면을 보지 않는 시스템으로서.이러한 사육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 이 의미 없는 일상의 표백된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개이자 시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손으로 개를 묻으러” 가는 세계이자 사육사에게 “혼자 빈손으로 걸어”가고 “빈손으로 걸어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이란 결국 ‘나’이자 ‘개’의 존재를 그저 지워 버리는 것에 가깝기에. 이 보이지 않으며 잡히지 않는 ‘개’의 존재는 그저 ‘비린내’와 ‘물’이란 감각의 영역에서만 배제된 자의 언어로써만 자신을 드러내게 될 뿐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듯이 “비에서는 항상 흙냄새가 나고 흙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처럼.이 ‘알 수 없음’처럼 희미한 흔적들이자 감각의 층위로만 드러나게 될 어떤 존재론적인 영역. 시인의 언어가 지닌 얼굴과 그 표정. ‘사육’하는 세계 자체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어떤 희망이 있다는 무가치한 바람을 버리는 것. 요컨대 벤야민의 말처럼 ‘오직 희망 없는 자들에게 주어져 있는 유일한 희망’을 희망 없이 꿈꾸려는 행위.결국 그의 언어는 말하자면 알아들을 수 없는 개의 목소리이자 얼굴이며 표정이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 했던 세계의 이면으로서. 그러나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육사로서의 세계와 개이자 나의 존재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살육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자 “헤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그가 곧 나라는 점. 사육당한 자이자 스스로를 사육하며 표백되고 무표정한 세계와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린 나의 존재. 이것은 개이자 시인의 또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와 시집의 제목이 가리키는 ‘사육’이 아닌 ‘사육사’로서의 의미가 아닐까. 개이자 이상적인 자아와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인식할 수조차 없는 그이자 현실의 나로서. (이상 김정현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